Donghoon Gang is an artist, composer, and researcher.
[KR]
등장인물
시인
본명은 성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동경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경성으로 돌아와 문학 동인 활동을 하며 왕성하게 글을 쓰던 중, 가장의 책임을 이유로 경성중앙방송국의 아나운서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선택은 그가 몸담았던 문학 공동체에서의 제명과 돌이킬 수 없는 단절로 이어진다.이후 그는 모든 과거를 숨긴 채 연고 없는 시골에 정착해 시인으로만 머물고자 한다. 특히 유달리 말수가 적다.
영이
시인의 딸. 전쟁에 나간 오빠의 소식을 듣고자 유복한 정희의 집에서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생경한 음악에 빠져, 서울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이유 모를 강경한 반대로, 결국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아버지의 원한이 깊다.
이후, 홀몸으로 상경하여 미8군 부대에서 공연을 하며 이름을 알리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하며 대중음악사에 기념비적인 인물로 남는다.
정희
유복한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자라, 현재는 그가 마련해 둔 자리에서아무런 흔들림 없이 살아가고 있다. 유일하게 그가 아버지의 뜻에 반대할 때는 아버지의 영이를 향한 못마땅함이다.
안내 잠시 후, 곧 강동훈 작, 강동훈 연출의 방송극 영없는 성음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1 극작가의 낭독
한 사내가 마이크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온 뒤, 무심하게 마이크를 툭툭 치며 목을 가다듬는다.
극작가 아아. 잘 들리려나 몰라.
(마이크 피드백 소리)
에헤이- 그러면 그렇지.
어찌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다.
(중얼거리는 듯 불평하며) 내가 어?
어떻게든 이 고물은 내가 죽어서도
관짝에 고이 모셔 가던가 해야지.
아아.
(갑자기 무게가 실린 목소리로) 이는 바야흐로 남의 손…
(갸우뚱 거리며) 가만보자… 손은 아니지!
그래, 세치 혀에 의해
(과장되게 말을 끌며)찌-익-
하고 그어져버린 평행선 이후 우리네 이야기올시다.
여기서 우리네란 누구를 일컫느냐-하면!
나하고 너, 우리하며 너희, 이놈들과 저놈, 이쪽 아니면 저쪽 또 그 뭐시기냐..
하여튼, 아이고- 나원참!
같은 하늘 아래 제 똑같이 신세지며 기생하는 벼룩 같은 삶들이
어찌나 별스럽게도 유난인지. 쯧쯧쯧
뭔 산도깨비도 아니고, 발자욱 하나 없이
이곳저곳 쏘다니는 목소리들 통에
나원, 살다살다 전차소리가 (소리치듯 과장하며) 아리가또!!!하며
다 반가울 지경이올시다.
아이고 뭔 글쓴다는 놈이, 주둥아리가 이리 가벼운지. 엣헴.
여담은 자! 여기까지 하시고,
동장군도 물리칠 고귀하고- 고귀한 창작욕에 불타는
대단한 시인 선생네 집구석부터 들여다 봐봅시다.
#2 시인의 안방
매서운 겨울 바람과 시야를 가릴 정도에 눈보라에도 시인의 안방은 등불과도 같이 밝혀져있다.
야심한 밤에, 홀로 책상에 앉아 시를 쓰는 시인.
그의 목소리는 입을 뗀지 오래된 것 마냥 잠겨있다.
시인 (펜을 쥐고 글을 적고 또 지워가며)
침묵은… 메아리가… 없되… 내.. 속 안을 맴돈다.
입 밖으로.. 채 나오지 못한…
혀 끝에 달린 말들은…
결국… 천장 구석에… 놓여…
밤새 나를… 내려다 본다…
오늘도.. 혀를 접어—
갑작스러운 대청너머 건넌방 인기척이 시인의 집중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시인 (푸념하듯 한 숨을 내맽으며) 하… 꼭 지금이냐.
저 문은 태풍이 와도 끄떡없더니
오늘은 왜 저리 성가신지.
오늘도….
큰 한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내뱉은 숨만큼 들이 삼킨다.
시인 (담배를 입에 물어 불분명한 발음으로)
나는.. 오늘도… 혀를 접어..
종이 위에… 눕힌다.
대청너머 건넌방에서 누군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시인 (피던 담배를 손에 들고 큰 소리로) 누구요.
당신이오?
시인은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듯이 끄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시인 (오랜만에 자리에 일어난 듯 앓는 소리를 짧게내며)
이 추위에 임자도 없는 방에는 왜.
걱정과 짜증이 섞인 마음으로 문을 열어 재낀 시인은 인기척이 들리던 건넌방의 불이 꺼져 있음을 확인한다.
시인 (놀람을 숨긴채 위협하는 목소리로) 누구요?
(혼잣말로) 이러고 있을게 아니지…
때마침 대청 한 구석에 놓여져 있던 곡괭이를 발견하고, 농기구는 생경한듯 어색하게 잡아 쥔다.
시인 임자 한 번 잘 만났소.
시인은 곡괭이를 집어 들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건넌방으로 다가간다.
시인 내가 지금 이래 보여도,
한 때 경성 바닥에, 내 이름 모르는 이는 없었소!
지금이라도 나와 무릎 꿇고 비는 시늉이라도 하면
내 오늘은 그냥 넘어가리다.
딱 셋 세겠소.
하나…
둘!
시인 스스로도 두려움이 먼저 앞서는 듯 정적이 순간 맴돈다.
(큰 숨과 함께) 세에—
시인은 문을 벌컥 열며, 당장이라도 내려찍을 듯한 기세로 칠흑같은 방을 들어간다.
#3 영이의 방
영이 (떨리며 두려운 목소리로 ) 아.. 아버지!
(다급하게 소리치며) 저.. 저 영이에요!
시인 (의아한 목소리로) 영이?
네가 왜.
가만 있어 보거라.
시인은 더듬거리며 어둠 속에서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켠다.
영이 (갑작스러운 조명에 눈이 시린듯이)
어으… 하나밖에 없는 딸 목소리가 그리 낯설어요?
시인 ……
이 시간에 불도 안밝히고 뭐하는 짓이냐.
영이 (불평하듯 중얼거리며) 맨날천날 전기 닳는다 뭐라하시면서…
시인 (짧게) 그게 그말이더냐.
영이 도둑인 줄 아셨어요?
시인 (차갑게) 이 시간엔 누구라도 의심스럽다.
자신을 방해꾼으로만 여겨, 부은 두눈과 누추한 행색을 보고도 그 어떠한 질문도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영이는 말문을 잃는다. 시인은 최소한의 관심인듯 짧게 영이를 위아래로 훑는다.
시인 자거라.
영이 저 사실 오늘—
용기내어 건넨 영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인은 불을 끄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며 말한다.
시인 밤이 깊었다.
영이는 안도감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앞서 생각에 잠긴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가만히 웅크려 앉아있다가, 아버지의 방으로 향해 문에 귀를 대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맴도는 글쓰는 소리에 영이는 수치심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과묵한 아버지는 무서운지, 신발을 두손에 꼭 쥐고 마루 끝에서 서서,
서걱서걱 소리만 들려오는 방에대고 소리지른다.
영이 아버지는 늘 당신밖에 모르시죠?
아무도 없는 지금이 반가우시고?
왜 늘 묻지는 않고 답만 하셔요!
영이의 생각과는 달리 방 안에 글쓰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들어 영이는 울부짖듯 소리지른다.
영이 저는 어머니처럼 살진 못해요!
아버지 말이 전부인냥, 더 이상은 저도 못하겠어요!
영이는 이내 구석에 쌓인 물건을 분풀이하듯 넘어뜨리고, 마당 너머 골목 끝으로 사라져간다.
Track #1
저 달아난다.
신짝 하나 살에 대고
엄동설한에 저 달아난다.
아니, 풍설이 무슨 대수랴.
잡지를 말아라, 저 달아난다.
달아난다, 저 달아난다.
말문 떡 막힌 제 애비 두고.
달아난다, 저 달아난다.
살 부벼대던 제 곳 두고.
불지 못해 옴싹 달싹
가여운 애비 두고 저 달아난다.
아니, 천지도 무심도 하셔라.
꼭 애빌 빼다박아, 저 달아난다.
달아난다, 저 달아난다.
말문 떡 막힌 제 애비 두고.
달아난다, 저 달아난다.
살 부벼대던 제 곳 두고.
달아난다, 저 달아난다.
말문 떡 막힌 제 애비 두고.
달아난다, 저 달아난다.
살 부벼대던 제 곳 두고.
#4 정희의 집 앞
눈보라가 여전히 몰아치는 자정 가까운 시간, 영이는 요새와도 같은 경란의 집 앞에 서서 돌맹이를 주워 담 너머 불이 꺼진 정희의 창문에 던져댄다.
영이 (경란의 부모님이 들을세라 속삭이며 부르듯이)
정희야…!
아으 추워.
허정희!
희미한 영이의 외침과 창문에 부딪히는 돌소리에 잠에서 깬 정희가 창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 재낀다.
정희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누구…세요?
영이 (여전히 속삭이듯) 나야! 영이!
정희 (어리둥절하고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영이? 영…이..?
영이 어우, 참
(전화일기에 멜로디를 부르지만 누가 들을까봐 속삭거리는 목소리로)
할로우? 할로우? 당신이 정희씨요?
정희 (가볍게 웃으며, 어이 없다는 듯이) 너는 이 와중에도 그러고 싶니?
아니지, 니가 왜 여기 있어?
영이 어우. 깍쟁이 지지배
일단 하룻밤만 신세좀 지자, 응?
부탁할게 응?
(애교어린 목소리로 전화일기에 멜로디를 부른다, 전보다 큰 목소리로)
저응 저응 아이 러브 유!
정희 (그만 하란 듯이) 쫌!
(속삭이며) 누가 들을라! 기다려봐.
정희는 창문을 조용히 닫고, 버선발로 현관을 향한 뒤 문을 열고 대문을 조심히 젖힌다.
정희 이게 뭔 난리니?
영이 (너무 추운듯이 몸을 떨며) 어으 추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정희 알겠어. 소리내지말고 들어가.
정희는 영이의 손을 이끌고 방으로 함께 향한다.
#5 정희의 방
어둠속에 탁상 위 램프만이 홀로 켜져있는 정희의 방.
영이의 집과 달리 침대까지 놓여져 있다.
영이는 겉옷을 부리나케 바닥에 던지고, 정희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얼굴만 내민다.
영이 (안도하듯) 어우, 살 것 같다.
정말 길바닥에서 얼어 죽을뻔 했어.
마른 세수를 하던 정희는 영이의 머리카락이 눈에 젖은 것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른다.
정희 야!
(목소리를 낮추며) 그 꼴을 하고 침대에 들어가면 어떡해!
(한숨을 쉬듯) 어이구, 내 팔자야.
영이 (삐친듯, 눈을 흘기며) 어우, 이 깍쟁이 기지배 여튼.
영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몸을 웅크린채 본인의 외투를 걸친다.
정희 (민망한듯이 읊조리며) 그… 내려오라 한건 아니었거든?
(억울하다는 듯이) 만날 지뜻대로 안되면 깍쟁이니, 세침데기니,
서울 것들은 다 이러냐느니.
영이는 본인에게 매일 놀림을 당하는 정희가 그저 귀엽고, 웃기기만하다.
영이 (킥킥대며 놀리듯이) 그러면 깍쟁이를 깍쟁이라 하지,
자유부인이라 불러주리?
정희는 얼굴이 빨개지며 손사래를 친다.
정희 (혼내듯이) 예끼! 못하는 말이 없어 진짜!
정희는 본인도 바닥에 앉아, 영이의 눈을 마주보고 다정하게 묻는다.
정희 (진지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이제 그만 말하시지?
정희의 다정한 질문에 영이도 금새 진지해져 눈시울을 붉힌다.
영이 ……
정희 (달래듯이) 얼른, 응?
영이 집을 나왔어.
아니 아버지는 나온줄도 모를거야.
정희 아버지랑 다퉜어? 겨우 말문 떼는 아버지랑 다툴 일이 뭐가있어?
영이 (갑자기 커진 목소리로) 그래, 그게 문제라고.
정희 복에 겨운 소리 하네,
우리 아버지는… 에휴 됐다.
그건 그렇다치고, 오빠랑 어머니는?
영이 병원에 있겠지.
정희 (캐묻듯이) 병원에 있으면 있는거지, 있겠지는 또 뭐야?
영이 같이 안갔어.
정희 너희 학교 바로 옆이잖아.
영이 (속상하고 답답하다는듯) 그래! 그게 문제라고…….
아니, 분명 병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학교 정문에서
보자기를 양손에 쥐고 오빠랑 같이 떡—하니 서있는거야.
정희 그게 뭐.
(갑자기 생각난듯이) 아, 그나저나 오빠는 좀 괜찮아?
영이 이제 제법 걸어. 목발이 익숙해진거 같긴 한데,
대신 어깨가 아프다고 난리야.
정희 (다행이라는듯 기뻐하며) 다행이다, 진짜.
너희 오빠 그렇게 된 후로, 온 동네 사람들이 눈치보는 통에…
정희는 본인이 말실수 했다는 듯이 말을 황급하게 멈추고, 변명하듯 말을 이어나간다.
정희 (횡설수설하며 오히려 커진 목소리로) 아니, 내말은
그만큼 다 한 마음으로 걱정했다는거지.
(목소리를 가다듬고 화제를 돌리듯이) 아니, 잘됐네!
그럼, 대체 뭐가 문젠데?
영이 말하기 싫어.
정희 너 길바닥에서 잘래?
영이는 입을 앙다물고 가만히 있는다.
정희 또 그 표정!
그냥 말해. 괜히 맘에 담아 홧병 키우지 말고.
영이 (겨우들릴 목소리로) 창피했어…
정희 뭐라고?
영이 (짜증난다는듯이) 아, 창피했다고!
정희는 예상치 못한 영이의 대답에 할말을 잃는다.
영이 (정희의 눈치를 보며 자책하듯)
알아. 니 친구 못돼 쳐먹고 나쁜 년인거.
나도 진짜 모르겠어. 내가 왜 그랬는지.
학교 친구들이랑 수업 끝나고 밖에 나가려는데,
그 행색을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줄 나도 알았겠냐고.
정희 그래서?
영이 모른채했어…
정희 ……
영이 (찔리듯이 화를 내며) 알아, 안다고!
학교 친구들은 내가 서울에서 온 너같은 아가씨인줄 알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아는 체를 하니?
정희 (기가 막힌다는 듯이) 뭐?
영이 (울컥한 목소리로) 정희야, 근데 더 비참한게 뭔지 알아?
엄마가 꽃같이 활짝 핀 얼굴을 순식간에 구기고,
오빠 손을 잡아 질질 끌어 뒤돌아 가더라고.
정희는 영이의 심경이 이해가 가면서도, 영이가 낯설어 보여 가만히 듣기만 한다.
영이 (자책하는 목소리로) 내가 미쳤지…
천사같은 우리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은거야 분명.
정희 (거짓말로 달래듯이) 어머니는 이해하실거야.
영이 (단호하게 자책하며) 아니. 평생토록 나를 원망하실거야.
오빠는 동생한테 짐이 될까봐 다시 숨으려 할테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엔…
아니. 알아도 관심 하나 없으실거야.
정희 그래도 말씀을 드렸어야지.
어쩌려고 그래?
영이 안해봤겠니?
들으려하지도 않아.
그 어떠한 관심 하나 없어보이는 빈 눈을 너가 안봐서 그래.
사람 피말리게 하는 그 놈의 침묵이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갑자기 정희의 손을 잡으며) 정희야. 정말이지 난 이제 다 지쳤어.
너무 답답하고… 그냥 서울로 가고 싶어.
정희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대화를 마치고 자려고 한다.
정희 (어린아이 달래듯이) 우리 영이, 속상했겠네.
안그래도 못생긴 얼굴 더 불어 터지기 전에,
우리 일단 자고 내일 이야기하자.
영이 (정희를 째려보며) 뭐? 니보다 낫거든?
정희는 탁상 위 램프를 끄고, 침대에 들어가 눕는다.
정희 (비아냥거리며) 아무럼 그럼요, 그렇고 말구요 애기씨.
영이 이게 진짜?
영이도 정희를 따라 침대에 들어가, 정희의 몸을 간지럽힌다.
정희 (간지러운듯이) 야! 하지마!
잘못했어! 항복, 항복!
영이 (앞머리를 입으로 후 불며) 자식이. 형님한테 까불기는.
정희 (과장하듯) 죽을 죄를 졌습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시지요!
영이 (사또를 흉내내며) 네 이년! 수청을 들라!
정희 (조근대는 목소리로) 아우 진짜! 못말려.
잠이나 자자. 나 진짜 졸려.
영이 (목소리는 줄어들지만 여전히 사또의 목소리로)
엣헴. 내 오늘은 그냥 넘어가마.
정희 (억지로 호응하며) 감사하옵니다, 나리.
나 잔다.
영이 그래 나도 잔다.
영이는 복잡한 마음으로 잠을 자려다 문뜩 아버지가 언급한 경성이 떠오른다.
영이 정희야, 자?
정희 응, 자.
영이 (짜증난다는듯이) 아니, 좀!
아버지가 경성에서 이름을 날렸더라나 뭐라나, 여튼
경성 이야기를 했다니까?
서울만 입 밖으로 나오면 불호령을 치는 사람이?
정희 (귀찮은듯 졸린 목소리로) 니가 잘못들었겠지.
영이 네 생각도 그렇지?
정희 (성의 없는 목소리로) 응, 완전.
영이 (삐친듯이) 알았다. 자라.
정희와 영이는 그렇게 잠에 든다.
#6 정희의 거실(엿듣기)
영이는 어제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듯이 곤히 자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에 문득 잠에서 깬다.
이른 새볔. 부엌에서 들려오는 주전자 끓는 소리와 어렴풋한 라디오 소리.
정희 (타이르는 목소리로) 아버지 나중에 이야기해요. 제발요.
잠에서 겨우 깨어 듣는 문 건너 소리이지만, 정희가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상황임은 확실히 깨달은 영이는 이불에서 조심히 빠져나와 창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정희 父 (속삭이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친구는 가려 사귀랬지. 몇 번을 말하니.
영이는 갑작스러운 당혹감에 휩쌀려 그 자리에 얼어 붙는다.
정희 왜 영이 이야기만 나오면 별안간 그러세요?
(마지막으로 다급한듯이) 이러다가 영이 들어요!
정희 父 (한숨)
내가 모르는 줄 아냐.
정희 대체 무엇을요? 네?
정희 父 그집 양반 말이다.
정희 영이 아버지는 또 왜 걸고 넘어지셔요.
정희 父 경성해서 뭘로 먹고 살았는지,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정희 (당황한듯) 그게 무슨 소리에요?
영이 아버지가 경성에 계셨던게 맞아요?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아니, 됐고 그게 지금 뭔 상관이에요.
정희 父 상관이 없긴.
한 혀로 두 말을 하던 양반이다.
정희의 아버지는 때마침 울리는 주전자 끓는 소리에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불을 끈다.
정희 父 혀는 한 번 갈라지면, 다시 붙는 법이 없다.
우리 등에 지금 당장 칼을 꽂아도 이상하지 않을 양반이야.
라디오에서 순간적인 잡음이 튀고, 정희는 조심히 다가가 라디오를 끈다.
정희 이러다가 영이 들어요.
(차분하지만 심란한 목소리로) 여튼 저녁에 이야기 해요.
정희 父 그 집 아들만 불쌍하게 됐지.
정희는 가만히 듣다가, 몹쓸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있는 힘껏 소리 지른다.
정희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거에요!
순간 쿵하고 창문 밖으로 누군가가 떨어진 소리가 들린다.
정희는 혹시나 싶어 토끼눈을 하고 방을 열어보지만, 이미 창문은 활짝 열려있다.
정희 (다급하게) 영이야!
(아버지에게 소리치며) 제가 뭐랬어요!
정희 父 영이도 살면서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다.
너도 분명 나한테 고마워 하는 날이 올게야.
#7 시인의 안방
먼동이 트기 직전, 영이의 가쁜 숨소리와 눈 밟는 소리만이 들린다.
영이는 안방으로 다가가 문을 천천히 연다.
시인 (낮게 기침을 하며) …뭐냐?
영이 (아무 감정도 없다는 듯이 단호한 목소리로) 저에요.
시인 (몸을 일으키며) 이른 아침부터 이게 뭔—
영이는 자신이 나간 사실조차 언급 않는 아버지에 순간적으로 감정이 차갑게 내려앉으며 처음으로 아버지 말을 끊는다.
영이 경성에 계셨죠?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시인 (놀란 마음을 애써 누륵고 침착한 목소리로)
아침부터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냐.
영이 (눈물을 참으며) 경성에서 뭘 하셨던 거에요?
뭘 하셨길래..
시인 (무심한 목소리로) 누가 그런 소릴 하더냐.
영이 아무도요.
아니요? 저 빼고 전부요.
시인은 대답을 할 거치가 없다는 듯이, 영이를 바라보지 않고 본인이 몸을 눕혔던 이부자리를 정돈하며 무심하게 말한다.
시인 남의 집 담벼락에 귀 붙이고 다니더니,
이젠 남의 말까지 주워오는구나.
영이 왜 말 안하셨어요?
저한테는 말하셨어야죠.
시인 할 필요가 없었다.
영이 저한테도요?
서울가고 싶어 몇날 며칠을 굶던 저한테도요?
시인 (날 선 숨) 말해 봐야, 네가 뭘 아느냐.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순간 바람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영이 한 혀로 두 말을 했다면서요.
시인 (순간 날카로운 눈으로 영이를 쳐다보며) 그만해라.
영이 (따지며 비아냥 거리듯이) 왜요.
그래서 저를 여기 시골 바닥에 묶어둔 거예요?
시인 …….
영이 제발 좀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시인 그때는 다 그러고 살았다.
변명도 않는 아버지의 태도에 영이는 더욱 실망스럽다.
영이 아버지는 늘 그런식이세요.
그때는 다 그랬다고, 그랬으니 응당 따라야하고.
(짧은 침묵)
영이 (숨을 삼키고) 그럼 지금은요?
시인 …….
영이 제 입에서 서울이 나오면 안되는 이유가 그거에요?
시인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서울이 아니라 경성이었다.
(순간 울컥하며) 다 널 위한 선택이었고.
처음보는 아버지의 고함과 붉어진 눈시울에 영이는 얼어 굳는다.
영이 ……
시인 그 곳은 엄연히 다른 곳이었다. 그 땐 그렇게 살아야했고.
영이 뭐가 달랐는데요.
시인 말이 달랐다.
영이 아버지 혀가 달랐겠죠.
시인 ……
영이 (몰아붙이듯이)그래서 혀를 잘라내셨어요?
본인의 치부를 숨기려고?
본인만 조용하면 아무도 모르겠거니 싶으셔서?
시인 나는 말을 골랐을 뿐이다.
영이 어떤 말이요.
시인 침묵을. 아니 글을.
허공에 떠돌지 않고 눌러 앉을 말들을.
영이 그래서 저도 아버지 같이 비겁하게 숨어 살라구요?
아무말도 않고 책 뒤에 숨어서?
시인 너는 모르고 사는게 낫다.
영이 아니요? 저는요—
아버지처럼 이렇게 비겁하게 살진 않을거에요.
어머니처럼 그 뜻, 곧이 곧대로 받들어 살지도 않을거구요.
순간의 정적과 함께 바람소리에 문이 덜컹 거린다.
시인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 곳에선 나는 이름 없이 불렸다.
영이 ……
시인 혀는 하나였지만 말은 둘이었지.
Track #2
그 곳
아주 오래된 일이지, 널 안아
걷고 또 걸어와 마주한 곳.
지금 여기. 바로 이 곳.
날 에워싸고 등을 밀어대던
무성한 소리 없는 이 곳.
너는 커가고, 진실은 두렵고,
세월은 야속하게만 흘러.
흐르다 넘쳐. 결국 지금.
날 닮은 너마저도 나를 뿌리쳐
가려는 곳.
걸어, 걸어, 너의 발이 멈출 그 곳은
매 걸음, 걸음, 온갖 잡음들이 뒤쫒고,
목을 놓아, 불러대는 너의 부름은,
돌아, 돌아, 결국 허공을 멤돌며
너를 집어 삼켜, 너의 이름 마저 지울 곳.
그 곳.
그 곳.
그 곳.
그 곳.
#8 토크쇼 프로그램
조명이 환히 밝혀진 세트장에 하얀 머리를 한 영이가 과거를 회상하듯 말을 이어나가고 있고, 진행자를 포함한 관중들은 영웅의 무용담을 듣는 것 마냥 몰입하여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 거리고 있다.
영이 그게…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이었어요.
저는 곧장 그길로 짐을 챙겨 서울로 올라가 버렸고,
감사하게도 선생님을 만나 무대를 오르며 전전하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비겁했어요.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 아버지를 몰아 세워
서울에 올라갈 궁리 뿐 이었으니까요.
진행자 저희야 선생님의 열정 덕분에 오늘날까지 선생님의 목소리로
위안을 달랠 수 있었죠.
방금, 그 때가 선생님께서 보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하셨는데,
데뷔를 한 이후로 고향에 내려가지 않으신건가요?
실례가 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생님.
영이 허허, 이 나이에 실례가 될게 뭐가 있겠어요.
보란듯이 출세해서, 아버지가 틀렸다고 증명하기 위해
정말 지독하게도,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몇 해가 지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미국에 가기 직전에 찾아갔었죠.
어머니랑 둘이서 껴안고 얼마나 울어댔던지.
지금도 남편은 가끔씩 그때를 따라하며 어설픈 한국어로 놀려요.
참, 실없는 양반이죠.
이건, 투 마치 인포메이션이고.
울음을 겨우 거두고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는 쇼킹했어요.
제가 집을 떠남과 동시에 아버지도 자취를 감추셨고,
병원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별안간 남편과 딸을 동시에 잃으신거죠.
그런데도 저도 참 독했던게…
아니다, 안티팬이 더 늘까봐 말을 아껴야겠어요.
진행자 (가볍게 웃으며) 선생님도 영상에 댓글 같은거 확인하세요?
영이 (손사레를 치며) 어우, 저는 안보려고 하는데도
그, 스마트폰이 문제야.
(갑자기 관객들에게 말하며) 여러분도 다 조심하세요.
손자놈은 할미가 신기한지, 매번 굳이 찾아서 보여주는 통에
저도 중독이 되버린 거 같아요.
진행자와 관객들이 가볍게 웃는다.
진행자 (관객들을 향하며) 여러분 다 악플 안다실거죠?
전설같은 선생님 영상에 누가 그런 짓을 하겠어요.
마저 이야기 해주세요 선생님.
영이 (장난어린 말투로) 제가 다 지켜보겠습니다?
어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듣는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버지한테 또 졌다.” 였어요.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애달프게 살았는데,
그럴 기회조차 결국엔 안주시고 사라져버리시니…
영이는 잠깐 뜸을 들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영이 억울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한번은,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데,
무대 밑에서 아버지가 같은 사람이 계속 눈에 밟히는거에요.
무대를 박차고 내려가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유일한 밥 그릇이 날아가니,
무대를 겨우 마치고, 한참을 헤집어 다니는데도 결국엔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래도 보고 떠난게 아닐까 싶어요…
(짧은 침묵)
속상해서 그날 밤, 선생님께 곧장 달려가 울면서 겨우 털어 놓았더니,
선생님은 얄밉게도 “스토리가 좋다!”라 하시며 저를 내쫒더니,
다음날 아침에 악보를 쓱— 들이 내미시더라구요.
그렇게해서, 여러분이 아는 곡이 탄생하게 된겁니다.
진행자 아! 그렇게 해서 그 곡이 나오게 된거군요.
(관객들을 향하며 능글맞게) 여러분도, 말이 나온김에 오늘날 선생님의
목소리로 들어보고 싶으시죠?
선생님, 실례가 안된다면 부탁 드려도 괜찮을까요?
영이 아니, 노래 시키려고 여기까지 부른거 아니에요?
돈 받았는데, 값어치는 해야죠.
진행자 역시 선생님 신세대이십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목소리로, 선생님께 청해 듣겠습니다.
≪影없는 聲音≫!
관객의 함성과 박수와 함께, 드럼의 예비박.
[EN]
Score for Light for 影없는 聲音,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