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KR]

影없는 聲音, 2026

[動行, 2025]

“될수록 일을 많이 하고, 돈을 마련하여 양행(洋行)[1]할 결심입니다.”

이애내로부터

 4월 23일

일본 고베시 니시하라쵸 미네니시 텐진시타 13

카밀은 나의 말을 끊고, 나의 모국어를 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모국의 음악을 물었다. 그 순간, 생전 처음 겪는 시끄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날따라 눈앞에 켜켜이 쌓인 악보더미는 유달리 창백했고, 그녀의 물음은 단지 내 피부색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몇 해 동안 다섯 직선 위에 점과 기호들을 우겨넣던 나의 노고가 스스로 선택한 수행인지, 아니면 몸 깊숙이 각인된 타인의 흔적이었는지를 꿰뚫는 화살이었다.

기나긴 침묵이 어설픈 파열음으로 찢겨나가자, 하얀 차이나카라를 입은 채 뒤돌아 이탈리아 가곡을 부르며 수행의 점수를 받던 케케묵은 치욕이 되살아났다.  끝끝내 불지 못해 침묵에 갇혀, 손바닥을 내려치던 단소의 무게와 함께, 내 안에 묻혀 있던 현 하나가 욱신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스물여덟에 큰 바다를 건너 이곳저곳을 떠돌다, 서른넷에 좋은 기회로 인해 제자리로 돌아오리라던 — 내게는 저주와도 같던 오래된 예언은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었다. 혀의 반이 잘려나가 말 한마디 떼지 못하는 꼴에, 어떠한 제안도 반가웠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감사함은 괘씸한 나의 두 눈마저 가린 채, 시간 저편의 무언가를 간곡하게 불러댔다. 

예슬은 나의 말을 듣고 십 년이라는 — 내게는 영겁과도 같은 숫자를 내뱉었다. 잘려나간 혀의 반 조각을 찾는 대가로는 자비로운 시간이었으나, 몸속의 웅웅거림을 끝내 삼켜낼 자신이 없었다.

1879년 3월, 에케르트는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이듬달인 4월, 그는 2년간의 계약을 맺고 도쿄 해군 군악대장으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1880년에는 일본 국가 작곡을 의뢰받게 되었다.

“얼마 전에 나는 해군성(Marine-Ministerium)으로부터 국가를 작곡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왜냐하면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국가가 없기 때문이다. 내 요구에 따라 여러 일본 멜로디가 제시되었다. 전달된 것으로부터 나는 몇 가지를 선택하고, 조화시켜 유럽의 악기에 맞는 화음으로 재구성하였다.”[2]

그 결과 1880년 11월 3일, 일본 국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기미가요〉가 처음 연주되었으며, 그로부터 8년 뒤인 1888년, 해군성은 <기미가요>의 악보를 발행해 외국에 공표되었다.『Japanische Hymne(일본 국가)』라는 제목과 함께 ‘nach einer altjapanischen Melodie(옛 일본 선율에 따른)’라는 부제가 붙은 표지에서 에케르트는 선율의 출처를 밝혔다.

이듬해 1899년 3월 31일, 에케르트는 약 20년간 일본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그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으나, 계약 만료와 함께 독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백 년이 지난 1999년, 〈기미가요〉는 일본의 공식 국가로 정식 공포되었다.

제주의 어느 숲에서 경분을 처음 만났다. 

예슬이 건네준 연락처로부터 꼬박 1년이 흐른 뒤였다. 여태 읽어온 그녀의 글보다 경분은 훨씬 더 야위어 있었다. 요동을 잠재우는 건 언제나 그녀의 글이었다. 그녀는 늘 나의 불편함보다 앞서 있었고, 그녀와 나란히 걷는 일은, 이미 답을 찾은 듯한 고요를 내게 안겨주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몇 주 전, 경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사치레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짧은 안부를 건네고는, 서두도 없이 글을 함께 쓰고 싶다고 감히 말했다. 터무니없는 제안이었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곧장 “알겠다”고 답하며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그녀의 글이 담처럼 쌓여 있었다. 순간, 잃어버린 혀의 반 조각이 어쩌면 저 담의 높이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의 탄생 이전에, 그녀는 내가 머물던 곳으로 향했고, 돌아와서는 발길이 닿았던 곳들의 역사들을 더듬듯 직조했다.

망명(亡命)과 유학(留學). 

망명은 삶의 끝자락에서 강제로 밀려난 도피이고, 유학은 스스로 택한 머묾 속에서 장소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녀와 나, 그리고 그들은 피치 못해 벗어나기 위해서였는가, 혹은 굳이 머물기 위해서였는가.


이십대였던 에케르트는, 오십대를 앞둔 나이에도 젊은 날과 같은 이유로 독일을 거쳐 1901년 2월 19일 한양에 도착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서양식 군악대를 도입하고 독일 작곡가를 초빙한 것은 단순한 음악적 목적만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제국을 향한 경외가 자리하고 있었다.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독일이 조약을 맺은 한양의 향연에서, 전함 헤르타(S.M.S. Hertha)의 해군 군악대가 간주곡(musikalisches Intermezzo)을 연주했다.

“군악대는 저녁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연주했다. 모든 손님은 그들의 자리를 정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식사가 지연되었다. 마침내 내 남편인 묄렌도르프가 등장하여 왜 식사가 지연되는지 이유를 밝혔는데, 그 이유는 김이 나는 접시를 들고서 음식을 나르던 시녀들이 연주를 듣고 놀라워서 그만 식사제공을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3]

한양에 도착한 에케르트는 통역 겸 조수로 백우용을, 감독관으로는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을 두고 재능 있는 악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 뒤가 납작하면 총명하지 못하다며 내쫓고, 악기를 조금만 잘못 잡아도 주먹과 뺨이 오가는 등 ‘쥐구멍에 소를 모는 듯한’[4] 혹독한 훈련을 강행했다. 

그 결과 불과 석 달 만인 9월 7일, 고종의 탄신일에 이르러 군악대는 마침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같은 해 겨울, 한반도 최초의 애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가 에케르트에 의해 ‘작곡’되어, 이듬해 처음 울려 퍼진 우리의 국가는 나라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듯 8년 남짓의 짧은 시간을 뒤로한 채, 1910년에는 결국 〈기미가요〉로 대체되었다.

2012년, 경분은 도쿄에서 교수로 있던 헤르만 고체프스키와 함께 대한제국 애국가를 새롭게 바라보는 연구를 내놓았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애국가〉의 작곡가인가? ― 〈대한제국 애국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라 이름 붙여진 이 연구는, 작곡과 편곡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당시의 맥락을 검토하며, 한반도 최초의 애국가에 대해 다층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준 것은 호머 헐버트가 1892년부터 1897년까지 발간한 『The Korean Repository』 가운데, 1896년 2월호 「Korean Vocal Music」에 실린 “parami punda(바람이 분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채보된 곡이었다.

1863년 미국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1886년 조선의 부름을 받아 선교사이자 교육자로 한반도의 땅을 밟았다. 그는 왕성한 출판 활동으로 당시 사회와 정치의 실상을 서양에 알렸고, 고종의 밀사로서 대한제국 말기 국권 수호의 일선에 섰다. 1907년 헤이그 특사들을 도운 뒤 일본 제국에 의해 사실상 추방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이어갔다.[5]

“바람이 분다”로 시작하는 헐버트의 채보 곡은 〈대한제국 애국가〉의 멜로디와 매우 흡사하였다. 다만 그것이 〈군밤타령〉, 〈매화타령〉, 〈계화타령〉 등 어떤 곡이었는지는 여전히 추측만 있을 뿐, 확실히 규명되지 못한 채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 곡이 ‘아악’이 아니라 ‘민요’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에케르트가 ‘작곡자’가 아닌 ‘편곡자’임을 암시하는 일차 자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한 문헌 가운데는 유일하게 알렌의 책에서 언급되었다. 『연대기 색인 추가(Supplement to A Chronological Index)』에서 “adaptation”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고,『코리아: 사실과 환상(Korea: Fact and Fancy)』, 그리고 『외국 음악의 역사』 중 「Korea」 부분에서도 반복된다.”[6]

1902년 7월 1일, 『대한제국 애국가』가 발행되어 1천 부의 악보를 대한제국 국내뿐 아니라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세계 십여개국에 배포를 하고 입항하는 외국 선편으로도 널리 선전하였다.[7]

앞선 『기미가요』와 같이 『대한제국 애국가』의 겉표지에도 부제가 붙었다. ‘nach koreanischen Motiven(한국적 모티브를 본뜬)’이라는 부제는 『기미가요』의 부제 ‘nach einer altjapanischen Melodie(옛 일본 선율에 따른)’와 명확히 구분되는 성격을 지니며, 이는 에케르트가 단지 한국적 요소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할 뿐, 『기미가요』의 경우와 달리 선율적 차원의 직접적 차용이 있었는지 여부를 단정할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이를 알기에, 그는 동아시아 두 국가의 국가를 자신이 ‘작곡’했음을 표지에 명기하지 않고, 오직 ‘von Franz Eckert(프란츠 에케르트로부터)’와 같은 모호한 출처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했을 것이다.

현재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된 26종의 2022 개정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 중, 단 한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로 채택된 안익태의 〈애국가〉로 시작한다. 그중 오직 『음악사』라 이름 붙은 전문 교과서 한 권만이 〈대한제국 애국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폭우가 내리던 날, 겨우 마주한 희문은 긴 대화의 끝에 내게 물었다. “국악이라는 단어의 탄생을 아느냐”고. 기록적인 그날의 빗줄기처럼 한반도 전체를 삼켜왔던 ‘양악’의 대척점에서 탄생한 ‘국악’이라는 이름은, 새로움과의 대립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조건으로, 이전의 모든 발자취를 한데 묶어 버렸다.

‘음악’이라는 이름에 닿지 못한 채, 빼앗긴 색과 함께 국악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어 과거로 밀려난 그 노래들은:

‘모티브’와 ‘멜로디’ 사이,

‘작곡’과 ‘편곡’ 사이,

“바람이 분다”로 시작하는 미상(未詳)의 민요와 〈대한제국 애국가〉사이, 

’動’과 ‘行’ 사이에 모호함에 가려진 채, 지워졌다 다시 쓰이는 음표처럼 맴돌고 있다.

거대한 흐름에 떠밀려 끝자락으로 내몰린, 잘려 나간 혀의 반 조각 같은 찰나들을 위해— 이제는, 굳이 다시 벗어남을 택할 때이다.

[1]

모모야마학원대학 사료실로부터 제공받은 이애내가 야나하기라에게 1931년 4월 23일에 보낸 편지의 번역을 맡은 아즈마 아키라는, 해당 단어가 현대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음을 고려하여 ‘양행(유학,수행)’으로 병기하였다.

[2]

Franz Eckert, “Die japanische Nationalhymne,” MOAG, Bd. 3, H. 23 (März 1881), p. 131에서 재인용, Kleider, Globetrotter Abenteurer Goldgräber, p. 148.

[3]

Rosalie von Moellendorff, P. G. von Moellendorff. Ein Lebensbild (Leipzig 1930), p. 66에서 재인용. Kneider, Globetrotter Abenteurer Goldgräber, pp. 150-152. 

[4]

『동명』, 1912년 12월 3일, 「조선양악의 몽환적 내력 2 – 함녕전(咸寧殿) 위에 시링크스의 유향(遺響)」.

[5]

 그는 주시경과 더불어 한글 연구에 매진하며 그 우수성을 알리고, 오늘날의 ‘띄어쓰기’를 도입하였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그를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존재”라 칭송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진정한 한국의 친구”라 부르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6]

이경분, 헤르만 고체프스키. (2012).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는 <대한제국 애국가>의 작곡가인가? - <대한제국 애국가>에 대한 새로운 고찰. 역사비평, 101, p. 392.

[7]

최창언, 「시위군악대와 대한 제국 애국가 2」 , p.81; Horace N. Allen, Korea: Fact and Fancy, (Methodist Publishing, 1904) 참고.


__ . .. —, 2024

[EN]

Score for Light for 影없는 聲音, 2026

動行: Move to Act, 2025

Axioms for a Sonic Ontology, 2025

__ . ..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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