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hoon Gang is an artist, composer, and resear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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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가 주는 공포는 오랜 기간 꽤 상당했다. 모든 생성이 경이로운만큼, 무언가는 필히 소멸된다는 사실은 딱 그 정도로 나를 두렵게 했다. 그 무언가에 야속하게 나도 포함되었으며, 결국 나의 탄생과 그 이후 이어짐에 대한 감사함과 더불어, 언제 닥칠지 모를 나의 부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지금 이순간에도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의 미약한 일부로서 주어진 겨우의 시간이 다하면 나의 미천한 역사가 소멸된다는, 이토록 극단적인 무한을 향한 광활한 경외심과 유한한 삶에 관한 염세는 늘 침대 위 천장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며 어린 시절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그렇다고 불멸을 꿈꾸는 호기를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시황제秦始皇帝의 명령을 받아 불로초를 가지고 돌아오겠다 장담하던 호기로운 서복徐福이, 결국 내 고향이자 그가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이곳에서도 영생의 묘약을 찾지 못한 채 남은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접했었기에, 모든 가능성이 이미 부정된 곳에 또 다른 이의 실패한 영웅담을 굳이 더하고 싶진 않았다.
나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위안은 어떻게든 필요했기에, 부재, 더 나아가 없음 자체를 포용하고자 했다. 이를 나타내는 0은 꽤 오랫동안 수로 간주되지 않았다. 수는 오랫동안 ‘개수'와 동일시되었기에, 개수의 측면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0은 보다 체계적인 기수법을 위한 구분자의 역할로서만 존재했으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무(無)로서의 0, 평형으로서의 0, 좌표 원점으로서의 0, 기존으로서의 0, 빈자리로서의 0, 수로서의 0[1] 등 다양한 지위를 획득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경계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에 겨우 자리를 차지하는 나의 연장(延長)에 그나마 위안을 준 것은 그 중 무로서의 0이었지만, 어렴풋이 기대했던 생성의 가능성은 담고 있지 않았다. 모든 존재의 바탕이자 모든 것을 선행하며, 부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내가 그토록 찾았던 0은, 결국 허(虛)로서의 0이었다. 나의 상(相)이 시간을 다하면 공기(空氣)와 같이 너무 미세해져 감각되지 않지만, 이 광활한 전체이자 모든 것의 바탕에 흩어진다는 허의 신념은 나에게 이유없는 해방감과 낭만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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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모든 것은 점 하나로부터 시작되었다. 뾰족한 연필 끝으로 간신히 찍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가장 최소한의 단위로 여겨졌던 점은 인도에서는 0을 대신하는 기호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겨우의 존재, 없음으로부터 생성되어 떨어져 나온 찰나를 나타내기 위한 치기와 같던 작은 점은 빈 여백과 이를 둘러싼 무한히 순환하는 경계를 가진 지금의 0의 모습이 갖춰짐과 동시에, 없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몸을 떠난 나의 존재가 온 전체에 흩뿌려짐에도 여전히 나의 부분임을 증명할 최소한의 단위는 분명 이 작은 점보다, 어쩌면 그들이 말했던 공기보다 더 미세할 것이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모든 가능성의 쪼개짐을 견딘, 모든 존재의 기본 실체이자 온전함과 단일의 본질,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것을, 사람들은 ‘모나드(Monad)’라 부르고 숫자 1로 나타냈다.
단자(모나드)들은 자연을 구성하는 근본 단위들이기 때문에 자연 과정에서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 즉 단자들은 부분이 없기 때문에 부분으로 분해되어 없어질 수도 없고, 부분들이 모여서 생성될 수도 없다. 단자는 오로지 신에 의한 창조를 통해서만 무로부터 생성되고, 신에 의한 파괴를 통해서만 무로 소멸될 수 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것이다.[2]
라이프니츠는 자연의 원리 안에서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는 이 작은 단위에 신성을 부여하고, ‘우주에 대해 영속적으로 반영하는 하나의 살아있는 거울[3]’이라 칭하며 각 모나드는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우주의 모든 원리를 내포한 소우주라 주장했다. 신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포와 같은 물질은 수많은 하위 모나드의 복합체이지만, 나의 정체성과 의식을 구성하는 주체적 모나드는 고유하다. 즉, 우리는 각자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나드의 폐쇄성이다. 그는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4]”라 비유하며, 다른 것에서부터 영향을 받는다면 더 이상 완전하고 독립적인 존재라 할 수 없고, 이는 그가 말한 실체의 개념에 위배되므로, 각자의 모나드는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나의 우주는 정말로 완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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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다는 나의 우주는 끊임없이 다른 우주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의 존재를 느끼고 수용한다. 나 이외에 존재에 대한 의심이나 믿음을 넘어, 나의 발현과 이에 상응하는 그들의 반응은 그들이 존재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메아리치며 나의 존재를 알린다.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는 매 순간, 그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단단해진 기억과 그들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추억 사이에서 어슴푸레 피어오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분명 감정이며, 각 우주가 서로를 증명하는 방식이자 그 증거이다.
그러나 이 감정은 찰나의 공유에서 비롯된 단순한 반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그들의 존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성되는 또 하나의 존재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우주이며, 우리는 분명 서로 교류하며 함께 무언가를 생성하고, 그로써 서로를 더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러한 상호작용은 신이 미리 배려한 조화[5]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이는 단순한 ‘현상’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상호작용이 서로를 표상하고 전이하는 상태를 ‘지각’이라 불렀고, 하나의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행하게 하는 내적 원리로서의 움직임을 ‘욕구’라 설명했다[6]. 여기서 말하는 욕구는 특정한 대상이나 목표가 없으며, 단지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근본적인 힘이며, 보다 완전함 혹은 전체로서의 조화로움을 향해 나아가려는 내적 동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욕구를 넘어 ‘기대’를 한다. 욕구의 결과로서의 변화가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기대는, 미래 지향적인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현재의 욕구를 가라 앉힌다. 우리 안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욕구와 기대는 결핍과 충족 가능성,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조명한다.
이러한 욕구와 기대는 단지 개인적인 내적 경험을 넘어서, 지각을 통해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더욱 확장된다. 나와 맞닥뜨리는 상대에 따라, 그리고 나의 욕구와 기대가 그들과 얼마나 상응하는지에 따라, 감정은 매 순간 고유한 우주로 우리 사이에서 생성되며, 이 수많은 감정의 우주는 우리를 웃게 하고 울게 하며, 우리 사이의 간격을 조정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들 속에서 우리는 굳이 그중 몇몇에 이름을 붙여 정의할 뿐이다.
우리와 원리를 같이하는 감정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각자 고유하지만 이름 붙여짐으로써 공감이라는 명목 아래 타자와의 감정적 합치를 요구한다. 각기 다르지만 서로 닮아 있는 우리는, 개별성과 공유되는 보편성 사이에서 같음과 다름을 넘나들며 서로를 밀고 당긴다.
그렇게 우리는 마주하고, 피하고,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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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온전하며, 둘을 거쳐 셋의 완전함에 이른다. 하나와 셋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둘은 그 속성상 대립과 분열을 의미하지만, 대립과 현상의 부정을 걸쳐 통합으로 나아가기에, 둘은 결국 창조 혹은 생성을 의미한다. 내가 아닌 그 어떠한 것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관계 속에서 무수한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둘’ 또는 ‘다른 것’의 원리를 ‘디아드(Dyad)’라 불렀다. 그들은 2가 신성한 모나드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가 통일성에 반란을 일으키고, 하나에서 출발한 최초의 숫자이자 최초의 선(善)에서의 일탈이라는 죄를 상징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인도유럽어에서 둘을 뜻하는 어근이 ‘불량'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그리스 접두사 ‘dys-(예: dyspepsia, 소화불량)’와 라틴어 ‘dis-(예: dishonorable, 불명예스러운)’는 모두 'duo’에서 파생되었다[7]. 더 나아가 ‘dubious(수상한)', 'doubt(의심)'와 ‘Zweifel(의혹)’과 같은 단어를 살펴볼 때, 불량에서 더 나아가 무언가의 존재를 부정 혹은 믿지 못하는 상태, 즉 의심하는 감정까지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심한다는 것은 마음이 둘로 갈라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디아드의 기본 원리는 ‘이중성’과 ‘양극성’이다. 양극 사이의 긴장은 서로 반대되는 관계, 대조, 차이의 형태로 모든 자연사와 인간사에서 일어난다. 디아드가 통일성으로부터 분리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반대되는 극들이 자신의 근본을 기억하고, 서로 결합해 원래의 통일 상태로 돌아가려고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것이 디아드의 역설이며, 이러한 역설은 모든 창조 과정의 기초를 이룬다.[8]
분열과 양극의 궁극적인 통합은 하나로의 회귀, 혹은 정신의 변증법적인 운동을 통해 셋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하지만, 이는 우리에게 방향만을 제시할 뿐,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결코 닿지 못할 하나와 셋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둘의 자리에서 머무는 우리는 꽤나 비극적으로 비춰지나, 이러한 양극 사이의 긴장에서 분화와 발전의 역사가 시작되며 생성이 이루어지므로, 그 속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디아드의 가장 중요한 성질은 ‘대담함’이다. 원래의 단일성에서 분리되면서 대담함과 용기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에 번민과 고뇌도 함께 따른다. 완전하던 나의 우주는 다른 우주를 목격한 순간, 과감히 불완전해지며, 모자람과 갈망을 자아낸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찾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마침내 둘에서 벗어난 우리는, 야누스처럼 하나가 되면서도 결코 서로를 마주할 수 없는 존재이기를 바라던 것일까?*
[1]
뉴턴 프레스, 『Newton Highlight 무와 유의 물리학』, (주)아이뉴턴, 2017, 6쪽.
[2]
윤선구, 라이프니츠 「단자론」,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54쪽.
[3]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The Monadology, trans. Robert Latt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898, §56.
[4]
위의 책, §7.
[5]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The Principles of Nature and Grace Based on Reason, §§3, 15 참조.
[6]
한우진, 「모나드의 운동과 상호작용에 대한 고찰」, 철학논구, 25(0), 1997, 144-146쪽.
[7]
올더스 헉슬리, 『영원의 철학』, Chatto & Windus, 1947, 17쪽.
[8]
마이클 슈나이더, 『자연, 예술, 과학의 수학적 원형』, 이충호 역, 경문사, 200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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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마지막 장인 '—'은 강동훈의 개인전 attacca의 서문인 ‘The Dyad: 대안으로서의 둘’에서 수정 및 보완되었다.
[EN]
Score for Light for 影없는 聲音, 2026
Axioms for a Sonic Ontolog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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