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KR]

[Quelpaert, 2026]

박연(朴延)이란 자는 아란타(阿蘭陀)[1] 사람이다.

효종 4년, 표류한 배 한 척이 진도군에 닿았다.

배 안에는 서른여섯 명이 타고 있었고, 

그들의 복식은 기이했으며 코는 높고 눈은 깊어, 

언어와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들을 서양(西洋)인이라 했고, 

어떤 이는 남만(南蠻)인이라 불렀다.

아란타는 다른 이름으로 화란(荷蘭)[2]이라고도 하고, 

홍이(紅夷) 또는 홍모(紅毛)라고도 불린다.

서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나라로, 

명나라 말기에 대만을 차지하였다가 이후 정성공에게 패하였다. 

일본은 아란타와 교역하며 외부의 원조로 삼았다고 한다.

…[3]


3년과 1억

애석하게도 인생의 첫 기억은 부모와의 이별이었다. 아시아 전체를 처량하게 만들었던 금융 위기는 남쪽의 섬까지도 밀려들어와 한 가정을 끝내 찢어냈다. 살이 빠진다는 신묘한 온천을 핑계 삼은 나름 창의적인 속임수에 넘어가, 나는 할머니 등에 업힌 채 양손을 흔들며 직접 그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그들은 3년 안에 1억을 타향에서 벌어 돌아오겠다는 정확한 기간과 합리적인 수치를 제시하였기에, 막연한 기다림을 대신해 그들의 노고를 격려하며 3년을 흘려낼 수 있었다. 대신 주변의 동정 어린 시선과 이에 따라오는 대견함에는 어느 정도 보답해야 했기에, 나는 재롱과 자랑 사이 어딘가에서 거짓된 처량함을 연기하며 과장된 명랑함을 선보였다.

몸을 몇 바퀴나 감싸고도 남을 차렵이불을 질질 끌어와 가슴에 두르고 저고리인 양 여미며, 유독 나를 향해 처량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좋아하는 트로트를 뽑아냈다. 성인 가요를 먼저 익힌 것은 가장의 채널 결정권의 결과가 아니라, 처세의 방편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나는 스스로의 안녕을 전함과 동시에, 합의한 수치를 훨씬 웃도는 34억을 그들에게 역으로 제시하며 그들의 귀환을 유예하는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냈다. 나의 사려 깊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초의 약속을 지켜 돌아왔다. 

3년 만에 다시 본 그들의 모습은 매우 낯설고 기이하여, 그들의 섭섭함을 달래는 데까지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불행한 가정이 다시 꾸려짐과 동시에, 3년 동안 연마했던 나의 레퍼토리는 즉시 검열당했고, 그들은 본인들이 목격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어린아이다움을 나에게 보상과도 같이 강요했다.

‘路’는 발(足)로 제각각(各) 다니는 길을 의미했으나, 이후 네 발 달린 친구들의 도움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육로 교역망은 대륙의 양 끝을 거의 잇게 되었다. 이어 대항해시대와 비행기의 발명은 물과 하늘을 가르며, 발이 아닌 탈것으로, 각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이동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고 그 의미 또한 확장되었다.

육로가 교역을 가능하게 하였다면, 해상로는 발견과 탐험, 그리고 그에 뒤따른 패권적 세력 확장을 통해 세계의 연결 방식을 변화시켰고, 항공로는 전 지구적 이동을 가속화하며 세계를 단일한 공동체로 묶는 동시에 내부의 균열 또한 심화시켰다.

100여 년 남짓한 역사를 지닌 하늘길이 열리기 이전, 바닷길을 본격적으로 연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서남단에 위치한 변방이었고, 그 지리적 입지와 농업에 부적합한 환경은 그들을 바다로 향하게 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와 인도를 넘어 결국 일본에까지 닿아 무역을 전개하였고, 새롭게 개척된 길을 따라 도착한 그들은 ‘남만인’이라 총칭되었으며, 그들과의 무역은 자연스럽게 ‘남만무역’이라 불렸다. 이는 경계 밖의 기이한 이들을 기존의 낯섦으로 치환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시선이었다.

이 남만무역은 물자와 함께 종교적 긴장까지 열도에 실어 날랐다. 포르투갈을 통해 전래된 가톨릭과 이를 신봉한 길리시단(吉利施端, キリシタン)의 확산은 일본 사회에 깊은 균열을 남겼고, 결국 시마바라의 난 이후 일본은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시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은 축출되었고, 종교적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만이 포교를 금지하는 조건 아래 나가사키 인근에 조성된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거점으로 교역을 허용받게 된다. 그들의 긴밀한 교류는 이후 ‘검은 배’의 등장 이전까지 약 20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

— 당시 목사 이원진, 판관 노정, 대정현감 권극중 —

계사년 7월 24일, 서양국만인(西洋國蠻人) 64명이 한 척의 배를 타고 함께 오다가 대정현 지역에서 난파되어 고을 아래 큰 바닷가 연안으로 밀려왔다. 

글로 물어보니, 십(十)[4]자를 세 번 그리고 숫자 여섯을 표시한 뒤,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또 십자를 두 번 그리고 숫자 여섯을 표시한 뒤, 눈을 감고 몸을 기울여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그들의 생김새는 기이하고, 옷 만듬새 또한 달랐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자기 자신을 가리킨 것은 살아 있는 자의 수를 뜻하는 듯했고, 눈을 감고 쓰러지는 시늉은 죽은 자의 수를 뜻하는 듯했다.

그 생사(生死) 수를 대조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한어(漢語)와 왜어(倭語) 통역, 그리고 류큐에서 표류해 돌아온 자들까지 동원했으나 모두 말이 통하지 않아 사정을 물을 길이 없었다.

이들을 남만을 비롯한 서양인들로 여겨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전에 남만에서 표류해 온 사람인 박연을 내려보내 언문으로 묻고 답하게 하였으며, 그 내용을 따로 기록하여 급히 보고하였다.

…[5]


[ja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원이자 서기였던 하멜은 1653년 네덜란드를 떠나, 그들의 아시아 무역 중심지였던 바타비아(Batavia, 현 자카르타)에서 스페르베르호(Sperwer)로 갈아탄 뒤 타이완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데지마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가파도에 표착하였다. 이곳이 어디냐는 물음에 현지인은 ‘개파도’라 답하였고, 하멜 일행은 이를 자신들의 문자로 ‘Quelpaert’[6]라 표기하였다.

가파도는 해발 약 20m 내외로 가장 낮은 섬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둘러싼 파도는 매우 매서워 섬을 덮는다 하여 본래 덮을 개(蓋)와 물결 파(波)를 써 ‘개파도(蓋波島)’라 불렸으며, 그 거센 파도는 하멜 일행을 순식간에 대정현(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7])까지 밀어냈다.

그들의 기이한 행색은 이전에 표착한 남만인 박연(Jan Janse de Weltevree)을 연상시켰고, 지구 반대편에서 표착한 남만인 일행은 극적으로 상봉하여 소매가 젖을 만큼 울며 모국어로 고향의 소식을 묻는 한편, 이 생경한 땅에서의 생존 방식을 논의하였다.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 jaja[8])’ 하였다.[9]


\20여 년 전에 먼저 표착하여 조선에 귀화한 뒤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벨테브레이는, 본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보내달라는 하멜 일행에게 당시 일본은 타국인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기에 그곳으로 간다 한들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과 함께 조선에 머물 것을 권하였다.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한 것은 1653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일본과 네덜란드가 포교 금지를 조건으로 제한된 교역을 유지하던 시기였다. 박연이 하멜 일행을 붙잡은 것은, 그가 기억하는 20년 전 일본의 상황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인지, 혹은 ‘길리시단’이냐는 물음에 ‘야’로 답한 그들의 목숨을 지켜주려던 호의였는지, 아니면 긴 타향살이 속에서 벗을 필요로 했던 외로운 이의 서글픈 묘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로부터 하멜 일행은 한양으로 이송되어 약 13년간 억류된 이후 탈출에 성공하여 그토록 바라던 데지마에 이르렀고,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표류기—사실상 밀린 봉급을 보상받기 위한 보고서—를 유럽에 알릴 수 있었다. 지난 13년간의 부재와 억울함을 알리고자 작성된 이 보고서는 제출되는 과정에서 유출되어 1668년 서로 다른 세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세 판본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Quelpaert’에 표착하여 13년 28일에 이르는 체류를 ‘노예와 같은 억류’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중 Saagman 판본에는 조선에 식인 악어와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기록과 삽화가 포함되어 유럽 내의 왜곡된 조선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듬해 1669년, ‘코레아(Corea)’라는 이름의 상선이 출항하여 조선과의 직접 교역을 시도하였으나,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고, 조선은 이후 약 200년이 지나 강제적 개항을 맞이하게 된다.

流와 由

이후 18세기를 지나 서로의 존재를 명확히 확인하기 이전까지, 유럽인들은 ‘남만인’ 혹은 ‘홍모인’으로 불렸다.[10] 황제의 나라와 인접 국가를 제외한 낯선 이들은 중심의 남쪽 변방에서 온 존재로 여겨졌기에, 기존의 남만인과 행색이 다른 이들이 명확히 구분되어 온전한 명칭을 얻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표착한 남만인을 제외하면, 이 섬에 이주한 이들의 대부분은 추방된 죄인들이었다. 원(元)과 명(明)은 조선 건국 이전까지 제주로 여러 인물을 유배 보냈고, 반도에서도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권력과 입장을 달리한 이들을 남쪽 끝으로 밀어냈다. 이처럼 큰 뜻을 거스른 자들이 강제로 보내진 곳이었기에, 조선 당시 이 섬은 ‘원악도(遠惡島)—멀고도 나쁜 섬’이라 불렸다. 이 이름은 단순한 별칭이 아니라, 그 거리와 여정 자체가 곧 귀환을 보장하지 않는 형벌, 다시 말해 반도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했다. 

거친 바다의 흐름에 의해 물리적으로 흘러들어온 이들과, 거대한 정치적 흐름에 의해 떠밀려 온 이들의 섬은 박연이 표착한 지 약 300년이 지나 새로운 주인들의 이동을 위한 경유지와 승리를 위한 주둔지로 변화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정읍의 알뜨르 비행장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의 중간 급유지이자 중국 본토 공습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이후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에 이르러서는 섬 전체가 거대한 요새로 변모했으며, 기이한 이들의 표착지이자 유배객들의 적거지(謫居地)였던 대정읍의 평원은 그렇게 격납고와 진지가 들어찬 전쟁의 최전선이 되었다.

그들의 군사적 목적 아래 섬 전역에 구축된 약 700개의 동굴진지는 머지않아 본래 주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었으며, 동시에 훗날 학살을 증언하는 장소로 남겨졌다.

피난(避難)과 피란(避亂)

을지로의 옛 극장가 앞에서 종원을 처음 만났다.

<목포의 눈물>로 알려진 일제강점기 ‘블루스의 여왕’ 이난영. 그 이전의 이름, 이옥례. 보통학교 중퇴 이후 데뷔 전까지 묘연했던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이었다. 

제주 출신 영화평론가이자 시인인 종원이 밝혀낸 제주 최초의 극장 창심관(暢心館), 그리고 남편의 술주정을 피해 목포에서 제주로 달아나 일본인 극장 주인의 식모로 일하던 이난영의 어머니. 아내에게서 딸로 대물림되던 폭력을 피해 어머니를 따라 제주로 피난 온 이난영과 오빠 이봉룡에 관한 정보를 그의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이후였다.

종원은 백발이 무색할 만큼 어린아이와도 같은 눈동자로 창심관을 발굴하게 된 모험담과 함께 직접 복사해 온 종이 뭉치를 건넸다. 원로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음악평론가였던 황문평이 1998년 출판한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중 이봉룡에 관한 대목이었다.

종원은 영사기사 조수였던 이봉룡의 실수로 불타버린 극장에 관한 에피소드와, 당시 신문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춰가며 ‘창심관’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이봉룡은 자신의 실수가 두려워 육지로 달아났고, 이전부터 극장 주인의 집에서 유성기를 틀어 놓고 흥얼거리던 이난영은 실력을 인정받아 극장 막간에 노래를 불렀다. 오빠의 실수로 불타버린 극장이 다시 문을 열던 날, 이난영은 정식 가수로 무대에 올랐다. 

가정의 재난을 야기했던 술병 대신, 이옥례의 손에는 마이크가 쥐어졌으며, 이후 삼천리가극단에 합류하며 ‘이난영’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을 만나 조선악극단의 지휘를 맡았던 손목인의 곡을 받아 <목포의 눈물>로 단숨에 시대의 아이콘이 된 그녀는 같은 조선악극단 소속이던 김해송과 결혼했다. 그들은 각각 ‘저고리씨스터’와 ‘아리랑보이스’로 활동을 이어갔고, 김해송은 특히 신민요, 재즈송, ‘만요(漫謠)’ 등 새로운 유행가로 두각을 나타내며 ‘짜스(Jazz)의 귀재(鬼才)’로 이름을 떨쳤다. 

1944년, 광복을 코앞에 두고 이철의 사망과 함께 사실상 와해된 조선악극단을 뒤로한 채, 이듬해 해방 이후 그들은 K.P.K 악극단을 조직하며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이후 그들은 미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태평양전쟁 시기 억압되었던 재즈와 블루스를 바탕으로 민요와 유행가를 재해석한 다채로운 레퍼토리와 함께 다양한 쇼와 뮤지컬을 선보였다. 해방 공간에서의 자유를 만끽하며 장르를 넘나들고 무대와 극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던 화려한 이력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발목을 묶는 족쇄가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김해송은 미군 캠프 순회공연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납북되었고, 남편을 찾아 서대문형무소 일대를 떠돌던 이난영은 결국 1·4 후퇴 당시 오빠 이봉룡과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본래 슬하에 12남매를 두었으나 다섯 아들은 일찍 병사하였고, 남은 7남매는 훗날 ‘The Kim Sisters’와 ‘The Kim Brothers’의 멤버가 되어 한국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노래를 이어나갔다.

끝까지 남편이 살아 있을 것이라 믿었던 이난영은, 김해송과 함께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이가 전해준 그의 타다 남은 옷자락을 뒤늦게 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죽음을 인정하며 무너져 내렸다.

전송가(戰頌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이 비극이 들이닥친 섬으로, 전쟁이라는 거대한 해일에 아무런 선택권도 없었던 고아 1,059명이 미 공군 수송기를 타고 옮겨졌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 함락이 임박하자, 전쟁의 한복판에서 차마 저버릴 수 없었던 아이들을 C-54 수송기 16대에 나누어 실어 나른 블레이즈델 중령의 작전은 훗날 미국 언론에 의해 ‘유모차 공수작전(Operation Kiddy Car)’으로 보도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 첫 크리스마스를 불과 닷새 앞둔 시점이었다.

유엔군의 지원으로 전쟁고아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서울시립아동양육원’은 수용 중이던 천여 명의 고아들이 제주로 옮겨지면서 함께 이전하였고, 이듬해 ‘한국보육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밖에도 여러 보육원이 제주로 이전했으나, 그들의 돌봄은 ‘육지’에서 피란 온 어린이들에게 한정되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어져 온 비극 속에서 부모를 잃은 제주 고아들을 위한 시설은, 피란 아동의 수용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마련되었다.

1937년경부터 신호나팔과 북을 사용하는 고적대와 유사한 형태의 관악대가 존재했으나, 음악적 활동을 섬 내에 급격히 확산시킨 것은 수많은 고아를 만들어내고 가족을 찢어 놓았던 한국전쟁이었다. 음악가이자 교육자였던 길버트 소령은 유엔 민간기구 협력단체의 제주 책임자로서 1952년 제주에 도착해, 당시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을 만나 전쟁고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자 하는 뜻을 밝혔다.

그는 고국의 단체와 지인들로부터 악기와 악보를 지원받아 도내 여러 학교에 기증하고 순회 지도하는 동시에, 약 40인 규모의 정규 한국보육원 악대를 조직해 체계적인 교육을 진행했다. 총칼에 부모를 빼앗긴 고아들의 손에는 무기 대신 악기가 쥐어졌고, 그들은 섬을 넘어 전국을 돌며 복수 대신 연주로 어른들을 위로했다.

군번 없는 용사

한국전쟁 초기, 여러 차례의 재편을 거쳐 창설된 제1훈련소는 1·4 후퇴 이후, 보다 남쪽인 제주도가 안전하게 신병을 훈련시킬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이승만 정부의 결정 아래 대정읍 ‘오무라 병영’[11]으로 이전되었다. 이를 거점으로 대구 및 거제도의 훈련소가 이동해 와 통합되었으며, 개정된 제1훈련소의 명칭은 ‘강병대(强兵臺)—강한 병사를 육성하는 터전’이었다. 패배와 비극이 익숙했던 섬에, 나라의 명운이 달린 전선에 투입될 병력을 양성하는 최후의 보루가 자리 잡게 된다.

모두가 기피하던 섬에는 적군이 쉽게 닿을 수 없어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피란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계용묵, 이중섭, 장리석, 김창열[12] 등 다양한 예술인들이 제주로 피란해 왔고, 그들은 짧은 피란 기간에도 불구하고 다방을 중심으로 섬 전체에 예술을 퍼뜨렸다. 한국인 최초의 음악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계정식도 그 가운데 있었다.

한편, 전쟁 이전부터 대중 곁에서 활동하던 예술인들 또한 곧 전선에 투입될 병력과 피란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군예대’라는 이름으로 대정에 집결하였다. 박시춘이 군예대장(이후 유호로 대체)을 맡았으며 고복수, 황금심, 구봉서, 신카나리아, 그리고 이난영의 무릎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남인수 등이 여기에 함께했다. 특히 박시춘과 남인수는 ‘조선의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와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郎)’로 불릴 만큼 당대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던 불멸의 콤비였다.

박시춘은 군예대를 이끔과 동시에 작곡 활동에도 매진했다. <육군 제1훈련소가>, <육군 제1훈련소 간부교육대가> 등을 통해 훈련소의 사기를 고취했으며, 황금심의 대표곡 <삼다도 소식> 또한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바다가 육지라면>

종원은 해방 이후 섬의 비극을 알리던 기관총 소리를 피해 간신히 도망쳐 도랑에 몸을 숨겨 살아남았고, 이후 중학생의 나이에 피란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동백다방’을 드나들며 계용묵을 만나 문장 수업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제주 출신으로서는 가장 먼저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다.[13]

교류했던 예술인들 이외에도 섬 전역을 순회하던 군예대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납북 위기에서 간신히 탈출해 군예대 소속이 된 신카나리아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들의 공연 장소는 기관총 소리가 울려대던 곳이었다.

종원과 같은 곳에서 같은 시대를 살며, 리모컨을 손에 쥐고 타향에 있는 부모 대신 본인의 애창곡을 가르치던 나의 할아버지는 올해 4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당신의 애창곡이자, 그 덕에 내 생애 처음으로 새겨진 노래는 애석하게도 1938년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된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해당 음반은 1943년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되었고, 같은 해 도쿄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를 울렸던 그의 또 다른 노래 <낙화삼천>은 작곡가 김해송이 ‘월북’했다는 사유로 1964년에 금지되었다.

강동훈으로부터

5월 1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1]

네덜란드를 지칭하던 포르투갈어 ‘올란다(Holanda)’의 일본식 음차어인 ‘오란다(オランダ)’를 한자로 옮긴 표기이다. 당시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에 유입된 명칭이다.

[2]

네덜란드의 대표 지역명인 네덜란드어 ‘홀란트(Holland)’의 한자 음차어이다. 당시 명·청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에 유입된 명칭이다.

[3]

『석재고(碩齋稿)』 권9, 「해동외사(海東外史)」, ‘박연(朴延)’

[4]

원문에는 ‘십(十)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로마 숫자 ‘Ⅹ’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5]

표시된 수의 합은 62명으로, 기록된 총원 64명과 두 명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는 『지영록(知瀛錄)』 「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의 다른 구절에서 병사자 2명이 별도로 기록된 것과 부합한다. 따라서 눈을 감고 쓰러지는 시늉으로 묘사된 26명은 난파 당시의 익사자를 의미한다.

[6]

해당 명칭의 어원에 관한 기존 학설은, 네덜란드의 첫 갤리선인 Quelpaert de Brack에서 유래했으며 하멜 이전 해당 선박이 섬을 발견함에 따라 지명이 형성되었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바, 첫 표착지인 ‘개파도’를 그들의 언어 체계에 따라 전사(轉寫)한 것이라는 제주 향토사학자 김웅철의 견해가 보다 타당해 보인다.

[7]

현재 표착지로 알려진 용머리해안은 고문서 어디에도 지목되지 않았으며, 『지영록(知瀛錄)』에는 ‘차귀진 아래 대야수연변(현재 신도 2리 도구리알 인근)’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하멜이 남긴 한라산과 녹남봉이 겹쳐지는 삽화의 시점과도 일치한다. 이에  신도 2리 주민들과 ‘하멜 표착지 규명 추진위원회’는 제주도 당국에 재조사를 요구하였으나, 15년째 실행되지 않고 있다.

[8]

영어의 ‘yes’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기본 긍정 표현 ‘ja’의 반복이다.

[9]

『효종실록(孝宗實錄)』 권11, 효종 4년 8월 6일(무진)

[10]

남만인의 세부적인 분류와 인식 형성에 관해서는 딜런 유, 『항해사 흰닭, 파드레,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의 기이한 모험』, 제3장 「남만인의 등장」을 참조.

[11]

미군의 일본 본토 침공에 대비해 증파된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그 명칭은 주로 묵었던 제58군 병기부장 오무라 슈(大村修)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12]

김창열은 경찰전문학교 졸업 후 경찰 신분으로 제주에 파견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피란 예술인들과는 그 성격과 체류 경위가 상이하다.

[13]

보다 자세한 사항은 김종원, 『시정신과 영화의 길』, 한상언영화연구소, 2023, 「1947년 3월 1일의 관덕정 광장」, 「문학의 꿈 키워준 계용묵 선생」 참조.

影없는 聲音, 2026

動行, 2025

__ . .. —, 2024

[EN]

Quelpaert, 2026

Score for Light for 影없는 聲音, 2026

動行: Move to Act, 2025

Axioms for a Sonic Ontology, 2025

__ . .. —, 2024

Material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