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hoon Gang is an artist, composer, and researcher based in Germany and Korea.
Through diverse media works that cross boundaries between exhibition and performance, visual and auditory, he dissolves borders between sculptural language and music, exploring integrative and alternative forms of expression.
Based in ethnomusicology and music psychology, he examines how sound and music are consumed and instrumentalized or misused for specific purposes in history and society. Utilizing acousmatic techniques that minimize visual information and maximize auditory imagery, he explores the experimental expansion possibilities of invisible media.
Recently, he has been tracing the influx of Western music into East Asia, driven by imperialist desires and the pursuit of modernity. He examines the resulting musical hierarchies and their colonial transformation, re-evaluating the remaining vestiges through a post-colonial lens.
[KR]
Addendum to Axioms for a Sonic Ontology, 장한길
소리는 본질적으로 휘발한다. 소리는 발생과 동시에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예술이다. 시각 예술이 공간을 점유하며 존재를 증명한다면 청각 예술은 시간을 가로지르며 생성을 반복한다. 근대 미학에서부터 소리는 조형 예술의 영역에 안착하기 어려운 이방인이었다. 미술관 안에서 소리는 종종 감상자의 관람을 방해하는 침입자이거나 전시의 분위기를 고조하는 배경으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소리는 붙잡을 수 없고 진열장에 넣을 수도 없다. 소리의 기록은 가능할지언정 소리의 현전 그 자체를 봉인하려는 시도는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미술관은 (소장 가능한) 영구불변의 물질과 시각의 장관을 욕망한다.
오늘날 예술의 현장에서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작업이 시각 예술의 영토로 진입하고자 할 때 필연으로 번역이라는 난해한 과제와 마주한다. 강동훈이 수행한 방대한 역사 고증과 자료 수집 그리고 텍스트의 침전이 미술관이라는 백색 공간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 인양될 때 그 치밀한 논리는 종종 납작한 이미지나 물화한 사물로 환원될 위기에 처한다. 특히 대상이 비-가시의 영역인 청각이라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소리는 흔적 없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이를 포획하려는 텍스트는 무기질의 활자로 박제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 틈새를 견디기 위해 소리의 여음을 공간 안에 묶어 둘 견고한 물질의 닻이 요청된다.
강동훈의 작업은 이 궁지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존재의 투쟁을 벌인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작곡가이자 연구자로 활동해 온 작가는 해방 이후 한반도의 청각 환경을 지배했던 세 언어의 공존과 교차라는 주제를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해 왔다. 이번 금호미술관 개인전《Triglossia》는 그 연구의 축적을 전시라는 시각의 형식으로 번역해 내려는 시도다. 작가는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관통하며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가 라디오 전파를 통해 뒤섞이던 시기의 음향 지형을 복원하되 그 복원의 방법으로 단순한 소리 자체의 재생이 아닌 소리가 거주했던 사물의 물성과 공간의 구축을 선택한다.
전시장에 놓인 라디오-사물 세 대는 더 이상 전파를 수신하지 않는다. 본래의 기능을 멈춘 채 좌대 위에 올려진 이 기계들은 이제 소리의 매개이기를 그치고 조각의 어법으로 전이한다. 소리가 한때 거주했던 집의 껍데기만 남은 이 사물들은 자신의 외형과 질감과 마감의 흔적을 통해 눈앞의 관람자에게 말을 건다. 건축의 구조를 띤 음향 설치 역시 마찬가지다. 다채널 스피커가 생산하는 음압은 공간의 밀도를 물리적으로 변화하며 감상자의 동선과 체류 시간을 조율한다. 소리는 이제 귀가 아닌 몸 전체로 감각되는 공간의 부피가 된다. 작가는 비로소 비-가시의 파동에 구축의 언어를 입혀 제도가 요구하는 물질적 알리바이를 완성한다.
작가가 이토록 집요하게 소리에 물질의 외피를 입히고 공간의 골격을 부여하는 이상 우리의 독해 역시 이 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는 청각의 관성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우리는 작가가 형체 없는 소리를 어떠한 시각 구조와 사물의 질감으로 번역하여 정착시켰는가를 응시해야 하며 소리가 거주하는 사물과 공간의 건축을 해독함으로써 연구와 조형이 위계 없이 공명하는 지점을 포착해야 한다. 이하의 논의는 그 포착을 위한 비평의 날을 세우는 과정이자 강동훈의 소리가 획득한 물질의 질서를 해부하는 기록이다. 그 탐색은 소리의 실천이 스스로 비평 언어를 축조해 온 계보에서 출발한다.
이 실천의 궤적을 단선의 시간 축으로 환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전통 화성학의 질서가 지배하던 음악의 영토에 산업 혁명의 기계적 소음을 질료로 호출했던 초기 아방가르드의 실험이 중대한 균열을 일으켰다면 이어 작가의 의도를 소거하고 침묵과 배경음을 등가의 위치에 놓았던 우연의 미학은 이 논의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도약시켰다. 우연을 경유한 이 전환은 소리를 시간 예술의 감옥에서 해방하여 장소와 공명하는 설치의 문법으로 분화했고 이후 음향 생태학과 매체 고고학 그리고 청취의 현상학이라는 갈래로 확장하며 비평의 지형도를 넓혀 왔다.
최근의 비평은 소리를 언어적 기호나 재현의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실재하는 물질적 유동으로 재정의하며 논의의 층위를 한 단계 더 확장하고 있다. 그간 강동훈의 작업을 둘러싼 논의 역시 이러한 비평의 단단한 지형 위에서 전개됐다. 작곡가라는 그의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논의의 초점을 주파수의 물리적 파동이나 청취의 현상학적 경험 쪽으로 이끌었으며 그의 작업을 특정한 좌표를 점유하는 조형이라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동하는 사건으로 간주하곤 했다. 다만 작업이 원고지 위에서 논해질 때와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 놓일 때 후자는 그 공간이 부과하는 시각의 질서 아래에서 전자의 논의와는 다른 독해를 요청한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요청에 응답하는 자리에서 한 가지 특별한 전제와 마주한다. 청각을 중심으로 한 기존 비평 관습에서 탈피하여 철저히 시각 예술의 관점에서 작가의 작품을 논해 보자는 (미술관의) 제안이다. 소리를 본령으로 삼는 작가에게서 소리의 우선권을 잠시 유보하라는 이 역설을 품은 요청은 강동훈의 작업이 미술관이라는 거대한 제도의 공간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다. 나아가 비평의 독법을 청각에서 시각으로 전환하여 비-가시의 상상력이 미술의 외피를 획득해 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은 소리와 물질 사이의 번역 불가능한 간극을 반어의 방식으로 방증한다.
전시장에는 1950년대의 라디오-사물 세 대가 위치한다. 금성사의 A-501과 산요의 SF-78 그리고 삼양전자의 5S-1A. 작가의 작업은 이 사물들을 발굴하고 수집하는 행위에서 시작했으나 전시의 논리 안에서 이 라디오들은 단순한 역사의 사료나 실용의 가전이 아니다. 이 세 대의 사물이 한자리에 놓이는 순간 통신 매체로서의 라디오가 식민과 해방 그리고 냉전이라는 시대의 조건 속에서 안팎으로 변형해 온 과정이 하나의 계보로 드러난다. 강동훈은 이 낡은 기계들을 소리통이 아닌 그 시공간의 여러 겹 기억이 응축된 사물로 격상한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변형하는 일련의 궤적이 세 대의 사물 안에 남아 있는 셈이다.
도구가 본래의 쓸모에서 이탈하여 기능을 멈출 때 비로소 그 사물 자체의 존재가 우리 눈앞에 드러난다는 통찰은 여기서 유효하게 작동한다. 좌대 위에 박제된 라디오들은 기능을 멈춤으로써 역설에 기대어 자기 육체와 그 표면에 새겨진 시간의 지층을 우리에게 들이밀며 1950년대의 공기를 웅변한다. 플라스틱 사출의 거친 자국과 다이얼의 마모된 눈금은 그 시대의 손길이 남긴 촉각의 화석이다. 감상자는 이 사물 앞에서 소리를 듣는 대신 소리가 부재하는 침묵의 농도를 응시하게 된다. 소리의 소멸이 아니라 시간을 굳건한 물성으로 치환하는 응고의 과정을 부재의 기념비로 대면한다.
역사의 눈으로 볼 때 이 사물들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 형태가 가리키는 참조의 족보에 있다. 1959년에 출시된 금성사의 A-501은 한국 전자산업의 시초이자 국산 1호 라디오라는 신화의 지위를 누린다. 그러나 그 신화의 내피를 들추어보면 A-501의 겉모습은 다름 아닌 산요의 라디오였다. 금성사의 라디오는 산요의 라디오와 유사한 외형을 취하면서도 내부 부품의 60%를 국내에서 제작함으로써 국산이라는 이름을 획득했다. 반면 삼양전자의 라디오는 산요와의 합작을 통해 사실상 일본의 부품을 그대로 조립한 기술 도입 생산에 가까웠다. A-501이 삼양의 제품보다 늦게 출시되었음에도 최초의 타이틀을 거머쥔 이유는 바로 이 국산 비율의 차이에 있었고 국가 재건이라는 거대 서사가 필요했던 상징의 힘은 그 지위를 더욱 굳건히 했다.
강동훈은 금성사와 삼양전자 그리고 산요의 라디오를 나란히 둠으로써 원본과 복제 그리고 합작이라는 기술 이전의 다양한 층위를 눈에 보이는 계보로 펼쳐 놓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흐름이 이후 한국 전자 산업의 거대한 지각 변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금성사의 라디오에 위기를 느낀 삼성은 1967년 경영 부실로 채권단에 넘어간 삼양전자와 합작 회사로 흡수하며 오늘날 삼성전자의 발판을 다진다. 전시장에 놓인 세 대의 라디오는 이처럼 한국 근대 산업사의 기원과 갈림길 그리고 합류가 응축된 사물이다. 따라서 이 사물들의 배치는 기술의 욕망과 자본의 논리가 교차했던 근대를 가리키는 지표로 성립한다.
강동훈이 이번 전시에서 다루는 핵심 개념인 Triglossia는 해방과 전후(戰後)의 이행기 동안 한반도를 감쌌던 청각의 징후다.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가 부분적으로 교차하며 형성한 이 혼종의 언어 환경은 단순한 언어학적 현상이 아니라 식민과 점령 그리고 냉전이라는 역사적 조건이 생산한 청각의 지형이었다. 작가는 이 언어적 현상을 미술관 공간 안에서 음향의 구조물로 번역한다. 다채널 음향 시스템은 소리를 단지 배경음으로 소진하지 않고 공간의 질감을 변화한다. 이로써 텍스트의 그물망을 빠져나갔던 시대의 음향은 마침내 물리적 부피를 획득하고 현재의 시간을 점유하는 단단한 실체로 우뚝 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전시장 안에서 세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소리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구도로 배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 언어는 하나의 혼합된 서사로 흘러가며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용해하는 양상을 띤다. 이는 해방 이후 한반도의 청각 환경이 단일한 국어의 영토로 정돈되기 이전에 겪어야 했던 과도기의 음향 지형을 재현한다. 전시장을 채우는 소리는 감상자의 고막을 때리며 자극하기보다 공기의 밀도를 미세하게 변화시키며 관람의 동선을 교란하는 촉각에 가까운 경험이다. 소리는 벽이 아니라 안개처럼 작동하며 감상자를 감싸는 유동하는 지형도를 형성한다.
Triglossia가 언어들의 횡적인 지리적 분포를 점유한다면 작가가 설계한 청각의 위상은 수직의 심연으로 파고든다. 금호미술관이 품은 건축의 가파른 낙차와 분절된 구조는 식민지 경험과 전쟁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로 이어진 한국 사회의 압축적 변동을 시각화할 적절한 장소로 지목된다. 작가는 이 계단을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라 압축적 성장의 이면에 은폐된 단절과 균열을 드러내는 수직의 기념비로 상정한다. 계단의 위와 아래 그 상승과 하강의 궤적은 서로 다른 시대의 기억과 주파수가 겹치며 공명하는 장소로 변모한다. 이 가파른 수직의 축은 그 자체로 압축된 시간의 두께를 증명하는 구조가 된다.
이로써 시각 예술의 영토로 진입하고자 했던 작가의 다층적 수행은 하나의 답안을 제출하지 않고 전시 형식이 감각에 부과하는 조건의 총체로 우리 앞에 당도한다. 강동훈이 퇴적한 고증과 문헌은 백색 공간의 매끄러운 표면에서 즉시 이미지로 환원되기보다 라디오 표면에 남은 상흔과 조악한 마감 그리고 계단과 낙차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경사를 경유하며 물성으로 귀환한다. 소리의 휘발은 멈추지 않으나 더 이상 소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파동의 잔여는 사물의 외피와 공간의 골격에 단단히 얽힌 채 끈질기게 지속하기 때문이다. Triglossia는 이제 부유하기를 멈추고 미술관의 그리드 위에 내려앉아 당대의 무게를 조용히 증언한다.
청각은 들림의 차원에서 구축의 차원으로 이동하고 구축은 곧장 관람자의 신체를 통과하며 이해의 속도를 늦추고 판독의 습관을 흔든다. 이 동요는 감상의 정서가 아니라 공적 진실의 톤을 획득한 음성과 배경으로 밀려난 잡음 사이의 위계가 재배치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형체 없는 음향은 마침내 시각의 문법을 빌리되 자신의 부재를 해명하려 들지 않고 도리어 시각의 논리 자체를 불안정하게 교란하며 응답한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휘발하던 소리의 역사가 견고한 물질의 닻을 내리고 파열한 주파수의 기념비로 기립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 장면은 흘러간 한 시대를 박제해 지금 우리의 시간 곁에 세워 두고 더 이상 과거로 회수되지 않는 채 지속한다.
[EN]
Addendum to Axioms for a Sonic Ontology, Han Gil Jang